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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소년' 거장'

니흠 2015. 7. 9. 16:53

  처음 클래식 음악에 빠져 들었을 때, 왜 프랑스에는 거장이 없는 지 종종 의문을 가졌다. 어떤 음악이 왜 좋고 싫은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대략 이런 사고였던 것 같다 ㅡ 오스트로-게르만 계의 바흐, 베토벤 등은 진중하게 들린 반면, 베를리오즈, 드뷔시, 라벨은 너무 가벼운 것 같았다. 후자의 음악 중 맘에 드는 작품은 한 두 개씩 있었지만, 한동안 그 이상 새로운 작품을 접하지는 않았다.

라벨 역시 마찬가지여서 볼레로 이외의 다른 음악을 거의 듣지 않았다. 그러다 한 팟캐스트에서 피아노 협주곡을 너무나도 애정을 담아 소개해서 나도 찾아 들어보게 되었다. 예전에 들었을 땐 별로였던 노래가 다시 들어보니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지 않나? 이 곡이 바로 그랬다.

 

Grimaud(pf.), Jurowski(지휘), European Chamber Orchestra

특히 '모차르트적' 2악장이 9분 10초부터 시작한다.



라벨은 묘하게 ‘비인간적’이다. 라벨은 기계에 집착하는 강박적인 성격이었다. 라벨 음악의 화려한 색채감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얇은 막 같은게 처져 있어서 사람들은 그의 작품들에서 작곡가의 내면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얘기하곤 한다. 라벨에게서 베토벤이나 말러와 같은 ‘내적 투쟁과 그 극복’과 같은 진중하거나 전진적인 서사를 찾을 순 없을 것이다. 라벨은 일견 피상적인 기쁨에만 치중한 것 같기도 하다. 라벨은 그가 전쟁에서 죽은 친구들을 추모하기 위해 쓴 ‘쿠프랭의 무덤’이 왜 이렇게 밝은 분위기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했다. "The dead are sad enough, in their eternal silence."


한편, 라벨의 음악을 들으면 밖을 장식하는 온갖 세련된 어법에도 불구하고 곡의 정수에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이 품어져 있는 것처럼 들리곤 한다(모차르트나 브리튼도 이와 비슷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라벨은 실제로 어린이들을 좋아하기도 했고, 한 죽은 소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를 작곡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이런 면에서 (베토벤과 비교해볼 때) 라벨은 퇴행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음악을 듣고서(라벨에게는 저 수식어가 꼭 들어맞는다) 고난과 맞서 싸우는 음악만을 ‘진정한’ 예술이라는 내 옛 편견을 고집하기는 어려워졌다.


라벨 작품들을 정말 아끼고 사랑하지만 라벨에게 거장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거장이란 호칭은 라벨이 입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가죽 자켓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