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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5 at Staatsoper Berlin Unter den Linden



 


빈약한 음향과 덜 다듬어진 연출에 빛이 바랜 공연.

나같은 허접이 무슨 평가를 하겠냐만 간략하게 후기를 남겨본다..

베를린은 6년여만에 다시 찾았다. 그 당시 운터 덴 린덴 일대가 한창 공사중이어서 슈타츠오퍼에서 공연을 못보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 공사가 생각보다 길어졌고, 올해 드디어 재개장했다고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정비된 극장에서 올려지는 첫 대규모 프로덕션이라고 한다. 오랜만의 큰 공연이라 그런지 관객들이 꽤나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홀 천장은 아주 특이한 무늬의 (마치 과일 배를 보관하는 충격흡수재 모양) 도자기 구조물이 차지하고 있었다.



공연 및 연주.

신기한 천장 구조를 보니 홀 음향이 궁금했다. 잔향이 거의 없는 건조한 소리였다. 그때문인지 바그너 특유의 매혹적 소노리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파이낸셜 타임스 리뷰 참조). 바그너의 신비로움이 사라진 음악은 그 빛이 심하게 바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지휘자 바렌보임은 큰 볼륨과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 템포를 설정했다. 그 결과로 성악가들 역시 섬세한 가창을 포기해야만 했다. 일례로 3막에서 다 죽어가야 할 트리스탄의 목소리가 여전히 활기차게 들렸던 건, 오케스트라 볼륨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보통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의 볼륨이 너무 크면 성악가들은 그 소리를 뛰어넘기 위해 악을 쓰거나(?) 혹은 그냥 그 소리에 묻히거나의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아무튼 직선적 어쿠스틱스 + 밸런스 실종 오케스트라 덕에 가끔은 귀가 아플 정도였다.

가수들 성량은 충분했다! 그러나 연기는 과장되게 느껴졌다. 단순하고 지나친 제스쳐는 구식으로 보였고 거의 우스꽝스러울 때도 있었다. 현대를 배경에 두고 (1막은 현대식 요트 내부가 배경) 펼쳐지는 이러한 정제되지 않은 연기는 다소 out-of-place-and-time 이었다. '전통적' 연출을 따라 아예 중세를 배경으로 했다면 연기가 이처럼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 아마 이런 신화적 플롯 및 고전적 정서를 담은 극을 현대에 올려야 한다는 점이 바그너 연출가가 맞닥뜨리는 고질적 난점 중 하나일 테다.

그렇지만 3막 연출은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트리스탄의 사랑에 대한 갈망(혹은 애정결핍??)이 어디서 나왔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연출가는 부모의 이른 사망을 제시했다. 트리스탄의 회상 장면에서 그의 부모의 다정한 모습이 연출된다. '과거'시점임을 전달하기 위해 조명을 탁한 오렌지 빛으로 바꾸면서 무대에 마치 빈티지 필름 같은 빛바랜 색조를 입히는데, 무척 직관적이었다.

그외에는... FT 리뷰에서 나오듯, 무대 전면에 설치된 은막에 투영되는 흑백 영상은 종종 난해하며, 성악가 연기의 몰입에 방해가 되었다. 한편, 마지막에 이졸데가 죽으면서 시계를 꺼내 품에 고이 간직한 채로 죽은 트리스탄 곁으로 다가가는 장면은 뭉클했다. 하지만 시계가 공연 내내 등장하지 않다가 갑작스레 의미심장한 장치로 동원되는 것은 다소 의아했다.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클라이맥스는 3막 피날레의 Liebestod 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대목은 신파의 극치임에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 주변의 관객들이 조용히 훌쩍였음. 사실 나도..). 널리 알려졌듯 바그너는 이 작품에서 조성적 긴장을 극한까지 밀여붙였다. 1막 전주곡에서 조성적 긴장을 처음 소개한 뒤 곡이 시작한 지 4~5시간 뒤에나 터뜨리는 그 효과는 정말 대단하다. 곡의 긴장이 끊임없이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마지막에야 해소되는 이런 (반쯤은 정신나간) 설계는 바그너 특유의 거대함grandiosity에 대한 집착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음악사적으로 바그너는 낭만주의와 20세기 음렬주의 사이에 낀 여러 작곡가 중 한명인데, 낭만주의의 모든 측면을 극한까지 끌고 가는 점이 그의 음악이 가진 특징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리스트나 말러 또한 이러한 후기 낭만주의 경향을 잘 나타내지만..). 니체가 이 작품에 대해 "위험한 매혹"이라고 했다는데, 그 표현은 비단 이 작품 뿐만 아니라 바그너 예술을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위험한" 발상들에는... 곡의 물리적 시간을 늘리는 시도 (반지 사이클은 10시간이 넘는다!), 비전통적 가창 구조 (레치타티보-아리아가 구분되지 않음), 모든 예술 요소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Gesamtkunstwerk), 조성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시도(반음계주의) 등등...바그너가 후기 낭만주의의 모든 요소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나머지, 그 이후 작곡가(이른바 신빈악파)가 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미지의 영역인 음렬주의(혹은 무조음악)로 들어서는 것 뿐이였을 수도.


좀 삐딱하게 보자면 피날레의 감동은 어쩌면 반사적, 기계적인 것일 수도 있다. 서너시간 동안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상황에 따라서는 졸음과 싸워가며) 비슷한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새로운 음악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청중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렇기에 왠만한 바그너 연주로도 피날레 이후 관객의 열렬한 환호를 끌어내기엔 부족함이 없다. 젋은 드뷔시는 바그너의 극단성에 염증을 느껴 풍자곡을 만들기도 했다고..(그럼에도 드뷔시의 유일한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바그너의 영향을 빼놓고 언급할 수 없다)


데니스 포먼이 비평에서 언급하듯, 현대 청중의 입장에서 본질적으로 이 '중세 연애극'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는 바그너의 '극단성'이라기 보다도 비현실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귀족 남녀가 서로에 대한 증오과 경멸을 넘어, '마법의 약'(Deus ex machina)을 마셔서 사랑에 빠진다는 점은 꽤나 몽상적이다. 이에 더해 사랑의 완성을 위해 죽음을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주인공들의 신념은 퇴행적이다 (바그너는 '발퀴레'에서 남매간의 사랑을 다룬 적도 있다만..). 이러한 결함에도 바그너의 위대한 음악은 관객을 사로잡아왔다. 그러나 바로 그 위험할 정도로 매혹적인 음악과 성긴 플롯 사이에서 오는 불균형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바그너 최고의 작품이라고 부르기에 주저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덧. 1달 전에 암스테르담에서도 트리스탄이 올라와서 볼 기회가 있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건너뛰었다. 만약 봤다면 트리스탄을 몇 주 간격으로 두 번 보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을텐데 아쉽다. 비교해서 보는 것도 흥미로웠을 듯.


공연 평점: 4.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