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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4일 홍대 무브홀에서 열린 세인트 빈센트(St. Vincent)의 내한 공연 후기입니다.


편의상(실은 애정을 담아) 세인트 빈센트는 '센빈센'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예쁜 미친년이네."

공연이 끝나자마자 내 뒤에서 감상평이 들려왔다. 피상적이지만(인디 공연을 처음 와봤다고 말한 걸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주 틀리지만은 않은 표현이다.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 류인) 다소 천박한 이 표현이지만, 센빈센의 예술을 가로지르는 절충주의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쁘'지만, "Oh, what an ordinary day. Take out the garbage, masturbate"('Birth in Reverse')란 가사를 태연하게 읊기도 하며, '예쁜' 멜로디에 섬뜩한 이미지를 연결시키기도 하니까 말이다('Laughing with a Mouth of Blood' 등).


오클라호마 태생(이지만 실은 텍사스 도시 사람에 더 가까운)의 애니 클락(예명 세인트 빈센트)은 요즘 영미 인디 바닥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가수이다. 폴리포닉 스프리의 일원으로 활동하다 2007년 솔로로 데뷔한 후, 그의 음악 커리어는 줄곧 상승곡선을 그려 왔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받은 음악적 영향은 방대하지만 내가 느낀 바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1집 <Marry Me>에서는 보컬 재즈의 영향('Marry Me' 'What Me Worry'와 같은 곡들)이 두드러졌다. 2집 <Actor>에서는 좀 더 록적으로 전환하면서 다양한 음향을 실험했다. <Actor>의 5번째 곡 'Black Rainbow'에서는 아기자기한 목관 앙상블로 시작해서, 아케이드 파이어 식의 드라마틱 록으로 끝마친다. 이어 앨범에서 가장 훌륭한 곡 'Marrow'가 그녀의 절충적 성향을 더욱 잘 드러낸다. 초반 클라리넷 도입부에서는 필립 글래스 느낌마저 든다. 도입부가 지나면 이어 앰비언트 음이 깔리면서 곡이 전개된다(프로듀서의 공일 수도 있겠다).라이브를 보면 온갖 색소폰이 총출동한다. 여기에 더해 분절된 기타 멜로디까지 완벽히 버무려내는 솜씨는 세인트 빈센트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다. (TVOTR이 센빈센과 비슷한 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세번째 앨범 <Strange Mercy> 발매 이후 본격적 팬이 되었다. 다음 앨범 <St. Vincent>를 내기 전 데이빗 번David Byrne과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Who'를 비롯한 일부를 빼고는 범작이라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공연 얘기를 하려다가 잠시 빠져버렸다. 곡 순서는 최근 센빈센 공연 셋리스트와 거의 동일한 것 같았다. 김밥 레코즈 등을 통해 그 무대 매너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기대가 컸다. 센빈센 본인 인터뷰를 보면 라이브를 꽤나 중시하는 것 같다. 그녀는 '관객과 교감하고, 청중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다. 클락의 열광적인 무대 매너(스테이지 다이브는 물론, 짐 모리슨 식으로 무대 위에서 죽은 척 하기도[각주:1])는 그녀가 단지 스튜디오에서 기타 이펙트 입히는 데 열중하는 은둔 천재형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증명해준다. 

애니 클락의 절충적인 성향은 앨범에서 뿐만 아니라 라이브에서도 드러난다. 범상치 않은 보컬 및 기타 재능[각주:2]을 갖고 있지만 공연은 자기 만족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각주:3]기타 실력(인디 가수가 더블 태핑 하는 걸 본 게 얼마 만인지)만으로도 얼마든지 청중들을 녹다운시킬 수 있지만, 그녀는 결코 기교를 과시하지 않는다. 거물 인디 밴드들은 몇십분에 이르는 악명 높은 잼을 하며 팬의 인내를 시험하곤 하지만, '기교를 위한 기교'는 하지 않는 게 그녀의 철칙이 아닐까? 

앞서 말한 대로 그녀의 공연 철칙은 관객과의 교감을 우선시한다는 점이다. 2층 난간(mezzanine)에 뛰어든 것도 (미리 안전요원들과 기본 동선에 관해 의논은 했을망정) 공연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으로 보였다. 공연 초반 객석에서 누군가 건네준 천사 머리띠를 쓰는 모습은 또다른 예였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보면, 초반부에 객석 위쪽에서 (무대 장치인) 샹들리에가 갑자기 떨어지며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이 있다. 뮤지컬이 끝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중 하나인데, 팬들이 라이브를 몇번 보면 금세 이 무대효과에 시들해질 것이다. 하지만 세인트 빈센트의 공연이라면, 여러 번 보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그녀의 무대 매너에 여러 번 놀랄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놀라운 무대 장악 능력은 즉흥성, 그러니까 매순간 이뤄지는 청중과 가수 간 상호교감을 통해 드러났다.


공연의 백미는 애니 클락 혼자 기타를 매고 'Strange Mercy'를 부른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도 앵콜을 외치며 센빈센을 불러내던 청중들은 순식간에 고요해지며 클락을 위한 완벽한 분위기를 조성해주었다. 숨소리마저 방해되는 순간을 만들어준 관객들의 집중력은 감동적이었다.

클락이 혼자 무대에 오른 또다른 장면은 앞서 'I Prefer Your Love'를 부를 때였다. 그녀 디스코그라피에서 아마도 가장 진솔한 곡일테다.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썼다는 이 곡에서 우리는 고혹적인 여가수chanteuse로서의 목소리를 (그녀의 또다른 목소리라 할 수 있는)기타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감상적인 멜로트론 반주 위에 그 못지 않은 솔직한 가사가 얹어지는 이 곡은, 흥분이 가라 앉은 지금 돌이켜 보면 조금 감정 과잉이 아니였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공연 당시에는 애니 클락이 지닌 또다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서 즐겁게 들었던 것 같다. (센빈센의 '노골적 감상성'은 1집 이후 점점 줄어들어서 조금 아쉽기는 하다. 나는 1집의 마지막 곡 'What Me Worry'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1집에서 공연한 곡 역시 'Lips' 뿐이었다) 




덧: 언론을 통해 나온 공식(?) 사진을 보니 내 반대편에서 줄곧 찍은 것 같다. 내가 서있던 곳에서도 좋은 구도가 상당히 많았는데 아쉽다. 위의 사진에서는 벽에 그림자가 멋있게 졌는데 좋은 카메라였다면 충분히 잡았을 것 같다.

(사진이 문제된다면 삭제할게요~)








나는 요며칠 무더위 속에서 무리했는지 뜻하지 않게 여름감기에 걸려서 다소 골골대는 상태였다. 컨디션만 좋았더라면 더 일찍 도착해서 앞줄에서 봤을텐데 내 저질 체력으로는 어려울 것 같아 포기. 하지만 공연장 뒤편의 음향 상태가 안 좋았다는 걸 검색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해당 공연장이 후면 하울링이 심하다는데 나는 앞에서 봐서 잘 모르겠다. 공연 초반에 클락의 기타 소리가 십여초간 전혀 안들리는 대형 사고가 났다. 클락은 꿋꿋이 공연을 진행했지만 아마 대부분 한국 팬들은 속으로 좋은 공연의 흐름이 끊기는 바람에 '미안하다ㅏㅏㅏㅏ 애니!!!!'를 외치지 않았을까. 이후에도 몇번 기타 소리가 빠졌던 것 같다. 다행히 중반부 이후에는 매끄럽게 진행되었던 느낌.

생각보다 많은 관중에 놀랐다(한국의 힙스터여, 단결하라!). 요즘 잘 나가는 센빈센이긴 하지만 이 정도일줄이야. 각종 매체를 통해 충분한 홍보가 되었던 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런지도. 



아직도 세인트 빈센트를 코앞에서 봤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여운이 남는 게 아마 좋은 공연을 봤다는 증거겠죠. 몇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공연들이 몇 개 있는데, 이 공연도 그렇게 되겠죠.

  1. 혹자는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다 [본문으로]
  2. 게다가 제대로 된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적도 없다고 한다. 물론 애니 클락이 버클리 음대에 다니다가 중퇴한 전력이 있기는 하다. [본문으로]
  3. (스튜디오 장인이라고 할 수 있는)케빈 실즈의 연주에서는 종종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게 내 경험.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