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짖는 곳

문화 차용의 이름으로

니흠 2014. 8. 11. 13:13

원래는 글의 초고를 5/7에 임시저장해 놓고 잊고 있었다. 며칠 전에 한 라디오 팟캐스트서 비슷한 문제를 언급한 것을 듣고는 마저 쓸 생각이 들었다. 엉성하다.




일본인이 욱일승천기를 들고 축구 경기장에 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볼 한국인이 있을까? 아니면 독일인이 베를린 한복판에서 노란색 명찰을 달고 다닌다면 유태인들의 반응은? 대략 비슷한 일을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이라고 주로 부르는)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근래 내 관심을 끈 두 사건이 있는데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와 관련된 일이다. 첫번째 사건은 유명 인디 밴드가 연루되어 이슈가 되었다.

Christina Fallin 사태 정리 (출처: 피치포크)


사태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사건의 발단이 된 폴린Fallin은 유명 인디 밴드 플레이밍 립스The Flaming Lips의 리더 웨인 코인Wayne Coyne의 지인이다. (폴린은 오클라호마 주지사의 딸이라고 한다. 오클라호마는 아메리카 원주민 커뮤니티가 크게 발달한 곳인 듯) 폴린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추장 모자headdress를 쓴 사진을 올렸다. 이를 본 플레이밍 립스의 또다른 멤버 클립 스컬록Kliph Scurlock은 폴린에게 그런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용과 함께 욕설을 담은 댓글을 써서 보냈다. 며칠 후 코인은 폴린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스컬록에게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냐'는 식으로 비난했다. 스컬록은 코인과 대립이 심해지고 결국 밴드에서 방출당한다. 그는 분노하여 탈퇴와 관련한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한다. 폴린 측은 매우 성의없는 사과문을 내어 스컬록의 반응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사건만 놓고 보면 한 밴드 멤버의 방출과 관련된 사소한 뒷담화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 사건에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미국인의 무지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건 당사자인 폴린이 올린 사과문의 진정성은 매우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사과문은 가식적이었다. 이 사건을 다룬 버즈피드의 한 기사(이 기사에 사과문 전문이 게재되어있다) 댓글란에도 댓글러 자신의 무지몽매함을 '문화상대성'의 개념을 빌어 애써 숨기려는 댓글들이 가득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대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는 인디 음악가마저 이런 행위에 동조했다는 점에서 이슈가 되었던 것 같다. (다음부터 플레이밍 립스 음악을 예전처럼 마냥 좋아하긴 힘들 것 같다)

버즈피드에서 달린 (개념찬) 댓글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를 일부 인용해보면,

"I am from Oklahoma as well and grew up less than 20 minutes away from a large reservation. When I was in middle school and high school the conditions there were horrid. It was akin to going to a developing country, but it was only 20 minutes from my home, Fallin's statement that growing up here we have a connection with Native culture is true,but most of us know that it is not okay as a NON-NATIVE person do something like she did. I can guarantee she has no clue which tribe that headdress came from or was model after. The outrage would be the worse if Ms. Fallin had done the same photo in blackface. As members of the group that was/is the oppressor of Native peoples it is not ever going to be okay for any white person to do what Ms. Fallin did." (by Kevin Eaton)

이 댓글의 요지는, 폴린이 사과문에서 주장한대로 '인디언 커뮤니티와 깊은 인연을 느꼈'더라면, 추장 모자를 쓰는 행위가 본능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댓글이 맞다는 전제 하에)그렇다면 그녀의 행위는 두가지 경우 중 하나에 속한다. 하나, 폴린은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역사에 대해 정말로 무지해서 이런 사진을 올린 것이다. 둘째, 그녀는 역사에 대해 알았지만 개의치 않고 사진을 올렸다. 첫째 경우, 폴린은 단지 무식해서 일을 저질렀으므로 도덕적 책임은 줄어든다. 대신 사과문에서의 '원주민 사회와의 깊은 인연'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둘째 경우, 그녀는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괴물이다. 첫째 경우에는 무식한 위선자가 되는 것이고, 둘째 경우에는 아이히만이 되는 것이다.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댓글은 가히 '도덕박약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수준을 잘 알 수 있었다. 아래에 인용해본다. 참고로 위 Eaton의 댓글은 Bradbury의 댓글에 대한 반론이다)

"If she wore a Japanese Kimono, there would be zero outrage, if she wore German Lederhosen no outrage, but Native American culture is off limits? If you are frustrated with the picture, that puts Native American culture on a separate level than all other cultures, so wouldn't that make you're outrage is racist." (by Ryan Bradbury)

그렇다. 이 사람은 '인종차별주의자RACIST'란 단어를 입에 담고 있다. 자신이야말로 RACIST에 가장 부합한다는 걸 알까? (이 키보드 워리어는 문화인류학의 업적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이 친구는 '문화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단지 문화는 다를 뿐이다'라는 상식을 배운 적이 없는 듯 하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대하라'부터 가르치는 대학 윤리학 입문 수업을 수강시켜야할까? 견적이 안 나온다. (미국 대학에서 실제 경험으로는 그토록 affirmative action에 대해 강의를 듣고도 끝까지 그 취지를 이해 못하는 학생들이 있긴 했다) 강자만이 보일 수 있는 오만함, 자신이 약자를 괴롭히는지 조차 느끼지 못하는 둔감함이 느껴진다.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정확히는, 그들을 학살한) 역사는 과거니까 잊고 지나가자'는 또다른 댓글과 함께 마비된 도덕성을 보여준다. 미합중국의 수많은 원죄 중 단연 (연대상으로나, 그 규모로나, 잔인함으로나) 가장 앞에 놓일 역사인데도 말이다. 


두번째 사건은 캐나다의 한 음악 페스티벌에서 추장 모자를 착용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PRI의 라디오 팟캐스트를 통해 들었다. 이 기사는 추장 모자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 시중에서 판매되는 추장 모자는 싸구려 모조품에 불과하며,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 유산을 저급화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도 추장 모자 착용은 문화 차용의 잘못된 예의 극치이다. 이는 "식민적 차용의 잔혹한 역사의 일부로써, (원주민 사회에) 고유하고 유의미한 것들을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고, 뻔하고 심지어는 불쾌한 목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폴린은 사과문에서 자신의 행위를 '문화 차용cultural apppropriation'이라는 개념을 빌어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 차용은 문화 착취로 변질할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차용자가 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부족하거나 그것의 고유한 맥락을 무시한다면 말이다. 차용이 이뤄지는 역학 관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자가 약자의 문화를 동등한 위치에서 빌린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면에서 폴린의 행위는 사려 깊지 않았다.


잠깐, 근데 이 모든 것은 폴린이라는 한 인간의 예술 행위에서 시작된 글이 아니었던가? '불쾌하지만 예술이니 인정해주자'라고 얼렁뚱땅 넘어갈 수도 있다.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분류할 생각은 없다. 불쾌한 예술을 받아들이고 말고 할 능력도 없다(그런 어려운 판단은 영등위에게 맡기자). 다만 도덕적 판단은 가능할 테다. 예술이든 아니든 폴린은 위선자 내지는 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