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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알단

복거일의 착각

니흠 2014. 9. 14. 00:39

중앙일보 토요일판에 실린 복거일의 글.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대한 서평을 남겼는데, 본인이 직접 완독하고 쓰는 글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복거일이 언제부터 '경제평론가' 직함을 달고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뜬금없이 문인이  '경제서'를 리뷰하니까 경제학과 졸업했다는 사실이 언급된 것 같기도 하다)


글은 문필가답게 유려하게 잘 쓰여진 건 확실하다. 하지만 교묘한 왜곡과 논점 이탈이 숨어있다. 복거일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가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그들의 자식들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상황이 문제다. 큰 돈을 번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다. 부자들이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생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꾸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피케티는 '절대 빈곤'에 대해 쓰지 않았다. 21세기 자본에서 다룬 건 (내가 종합한 바로는) 소득 불평등, 그러니까 상대 빈곤의 추이에 관한 것이었다. 피케티와 직접 관련은 없는 글이지만 복거일 서평의 요지를 잘 반박하는 저명한 경제학자 밥 실러의 글이 있어서 일부 인용해 본다. (실러 역시 재인용한 거지만) 

Obviously nothing can enable the majority of the population to be better off than everyone else. But not only is it possible for most people to be better off than they used to be, that is precisely what economic growth means.”


실러의 글 전문은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조금은 뒤죽박죽인 글이다)


복거일이 다룬 '이동성'의 문제도 핵심에서 벗어난 얘기이다. 이동성 역시 소득 문제에서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사회 계층 전체, 특히 중산층의 소득이 증가하는 게 더 급박한 상황이다. 일례로 미국 노동자 실질 임금이 (동기간 기업 임원진의 임금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더욱 대비된다)수십년 째 정체되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근본적으로 계층 간 소득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계층 간 이동성 증가는 무의미하다. 이 때의 이동성 증가는 오직 신분 상승의 '신데렐라 스토리' 아니면 신분 추락의 '내가 이래뵈도 왕년엔 잘 나갔는데...하는' 사례가 늘어난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사회보다는 비록 '대박 아님 쪽박' 스토리는 없을지언정 다같이 조금씩 더 잘 살게 되는 사회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복거일은 피케티가 제안한 '개인 순 자산에 기반한 누진세' (복거일은 교묘하게 '부자에 대한 징벌적 소득세'라고 바꿔 부른다)에 확신이 베어 있지 않다며 그를 깎아 내린다. 피케티 스스로도 인정했다시피 이 해법은 부자들의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해법이 적어도 복거일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옥'을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피케티가 책에서 내내 주장한 바는 '정치의 개입 없이 소득 불평등이 저절로 개선된 적은 없다' 이다(피케티에 따르면 이는 개입이 없는 상태의 시장 경제에서는 자본 수익율이 경제 성장률을 상회하기 때문이다. 줄여서 'r > g'). 복거일이 피케티의 제안을 비판하고 싶었다면, 피케티가 통계 자료와 씨름한 끝에 도출한 정리인 "r > g" 부터 물고 늘어져야 한다. 하지만 '경제 평론가' 라는 복거일이 그럴 의지나 능력은 없는 모양이다(그럼 서평을 쓰지 말든지. 복거일의 글은 대형 일간지에 실린 서평 치고는 참으로 그 수준이 부끄러웠다. 우리 사회의 지적 토양이 이것밖에 안되나 싶었다). 더 나아가 그는 피케티 스스로 인정하는 제안의 미진함이 그 실현가능성에 대한 회의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피케티는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자' 라는 방향성 자체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인터뷰에서 밝히다시피 '자산 누진세'라는 해법이 부자들의 반대를 이겨내고 실행될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정확한 인터뷰의 출처는 기억 안나지만(어떤 팟캐스트였던 것 같다), 피케티 개인 의견으로는 부자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결국에는 누진세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복거일은 '한국 사회 불평등 수준, 별 문제 없다!' 한 마디를 하면 될 것을, 대형 일간지 지면 전체를 할애하여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한국에 피케티 책 한 권 반박할 주류 경제학자 한 명조차도 찾기 힘든가? 아니면 주류 경제학자마저도 인정하는 게 불평등 문제의 심각성이기 때문일까? 합리적 비판 대신 근거 없는 중상이 가득한 글이었다. 지식인의 탈을 쓴 몽상가의 궤변을 읽고 나니, 나마저 '선동'당할 뻔했다.

굳이 영미권 언론에 빗대어가면서 까지 한국 언론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에서 나온 피케티 자료의 통계 왜곡에 대한 지적, Project Syndicate에서 스티글리츠가 한 제안(피케티의 말과 달리 '자본이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문제이다'라는 내용) 등은 결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들 외에도 정치가, 경제학자(래리 서머스 외 다수), 언론인(FT, WSJ의 반박 글) 등 종사 분야를 막론하고 생산적 토론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면, 한국의 이 언론은 반지성에 기반한 담론을 형성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외에도 복거일의 편협한 관점은 곳곳에 보인다. 가격이 수요,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는 한계효용학파의 주장은 주류 경제학에서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마르크스는 한계효용 개념에 반대했다. 하지만 폴라니를 비롯한 비주류 경제학자들 역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을 부인하고 한계효용 개념을 받아들인 바 있다.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류 경제학(신고전주의 학파)이 정당성을 부여받는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복거일 류의 반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크루그먼의 뉴욕 타임스 사설 한편 링크해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통계에 대해 반박을 하는 게 맞는데, 너네 우파들은 (공화당, WSJ 등등) 맑스주의자라는 딱지만 붙이고 앉아 있다' 라는 내용.




지방세니 담배값(담뱃값?) 인상이니 뭐니 논란이 많다. 일부는 '복지 재원 마련'이라고 포장하는 모양이다. 그럴꺼면 왜 술은 그대로 두고 담배만 올리지 하는 의문도 든다. 국민 정서도 그렇고 복지에 대한 수요는 계속 늘어나는데, 정부는 소득세나 법인세 등에는 손 댈 생각이 없으니 해법은 단순해 진다. 아무튼 그 남은 선택지가 '부자감세 서민증세'인 줄 다 알겠지 뭐. 다같이 열심히 허리띠 졸라매면 언젠가는 잘 살게 되리라는 거.. 다들 아시면서 박근혜 뽑은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