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내가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루체른의 바그너 기념관에서였다. 그 곳에 가기 전까지는 비록 바그너 팬, 혹은 예비 바그네리안(?)을 자처함에도 바그너가 오페라 외의 장르에도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미 나는 몇주전에 베를린 도이체 오퍼에서 탄호이저, 빈 슈타츠오퍼에서 발퀴레를 관람한 상태였다. 스위스가 내 여정의 거의 막바지였으니 바그너와는 여행중 마지막 만남인 셈이다. 이번 유럽 여행의 메인 테마는 클래식 공연 감상이었는데, 그러다보니 공연 외에도 음악가들과 관련된 장소는 한번쯤 시간을 내어 가보고 싶었다.

루체른의 바그너 기념관 가는 길. 왼쪽편으로 이어진 길이 기념관 방향이고, 오른쪽 길은 그냥 산책로이다. 조금만 더 여유를 부렸다면 산책도 해보았을텐데.



생각보다 많이 아담한 기념관. 바그너가 생전에 화를 피해 잠시 머무를 생각으로 택한 곳이라 그런지 대저택같은 분위기는 아니다.


이어지는 사진은 기념관 내부. 음악 감상 시설을 갖춰놓았는데, 저렇게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추는 창가에서 그 음악을 들은 건 정말 따뜻한 경험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스위스는 40일간의 여행 중 꽤나 후반부에 속해있었고, 나는 여독이 쌓일대로 쌓여 꽤나 노곤한 상태였다. 게다가 나는 이 기념관을 찾아가면서도 그렇게 맘편한 상태가 아니였다. 이 날 이미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했는데, 내가 맡겨놓은 짐을 찾으러 5시까지 다시 돌아오라는 말을 리셉션에서 들었다. 그 이후에 온다면 짐을 보관해놓은 방을 개방해야 해서 짐이 없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로 인해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가운데 기념관에 도착하니 이미 4시경이었다. 여행지에서는 뭐든지 느릿느릿, 완상하며 보는 나로서는 도저히 이 기념관을 1시간 안에 둘러볼 수 없다는 생각이 입구 초입에서부터 들었다. 일단 들어가서 최대한 볼 것만 보고 나오자 생각했다.

 들어가서 2층에 올라가면 위의 사진처럼 아주 한적한 공간이 펼쳐진다. 2층에 들어서자마자 안내용 컴퓨터(PC라고 쓰려다가 생각해보니 아이맥이었다)가 있길래 헤드폰을 끼고 이것저것 클릭해보았다. 컴퓨터에는 바그너가 바로 이 장소에서 작곡한 지그프리트 목가를 감상할 수 있게 해놓았다.

 그런데 음악을 듣기 시작하니, 분명히 시간에 쫓기는 몸인데도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바그너가 작곡한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도 하는 곡이었으니 당연한 것이었을까? 단순히 아름답다는 수사 외에도 한적함, 행복함, 고즈넉함 많은 말들이 거들어질 수 있다. 그 음악, 그 공간은 갈 길이 바쁘디 바쁜 내 신분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여행 중에 그렇게 한가로웠던 적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여행을 떠나면 공연히 욕심을 부려서 평소보다 무리를 하기 마련인데 그렇기에 이 곳에서 찾았던 값비싼 여유는 더욱 가치있게 느껴진다.



응접실 식탁에 놓여있는 방명록. 나도 한마디 써놓았다.




바그너와의 가상 만찬. 근사하지 않은가?



기념관에서 나오면서. 나오니 이미 약속한 5시는 지나있었다. 하지만 들어올 때와 나갈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이 이렇게 적용될 줄이야, 내 짐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게 되버렸는데도 마음이 신기하게도 가벼웠다. 귀중한 여유를 누리고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숙소에서부터 이어진 오솔길을 통해 20여분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반쯤은 예상한대로 내 짐은 이상없이 잘 놓여있었다. 배낭여행자의 짐이 얼마나 값이 나가겠는가? 어쩌면 내 캐리어 값이 안에 들은 짐의 값보다도 더 나갈 수도 있다.


그리고 나서 이틀 뒤에 바르셀로나로 이동했다.

  위 사진은 가우디의 카사 바트요 내부이다. 건물에 들어가서 느릿느릿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낯익은 음악이 들려왔다. 기둥에 기대있는 저 남자처럼 기대서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면서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해보았다...맞다! 바로 며칠 전에 들었던 '지그프리트 목가'였다! 단 한번 들어본 곡이었음에도 그 경험이 워낙 인상적이서인지 그 곡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가운데..카사 바트요의 저 거실에서 다시 한번 그 곡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